머리를 사람 머리로 교체하든지 해야지

뇌용량이 후달려서 영어로 된 책 하나 읽는 데 무슨 몇 주씩 걸린당께요!
게다가 연속으로 두 권 읽으면 앞에 건 내용 다 까먹는당께요!
이게 다 뇌무게 25그램인 고양이 머리의 한계지라예.


참고로 사람 뇌무게는 성인 남자 기준 1,400그램.
고양이의 56배.


싱글 코어 1스레드 CPU와 쿼드 코어 8스레드 CPU의 차이 정도라고 해야죠.
컴퓨터는 쿼드 코어 4스레드 쓰지만,
뇌가 싱글 코어 1스레드라 문제가 많습죠.


게다가 뇌에 달린 CPU는 MMX166.
이게 한 시대를 풍미한 CPU이긴 한데 그게 언제 적 얘기더라 (...)








미국대장이 아닌 자살대장
스샷 찍고 바로 122밀리 포탄으로 장갑과 철골을 분리시켜 버림!


독일제 APCR탄의 특징

제가 독자적으로 쾨니히스티거 주포로 사용된 탄인 Pzgr.40/43 APCR탄을 고속 구경 감소탄으로 번역했는데, 이러한 독자적인 번역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Pzgr.40/43 APCR의 특징

1. High velocity 고속
2. Sub-calibre 구경 감소?
3. Tungsten core 텅스텐 탄심




<출전>
Thomas L. Jentz, Germanys Tiger Tanks: Tiger I & Tiger II: Combat Tactics, 10p




이 세 가지가 대표적인 Pzgr.40/43 APCR탄의 특징입니다. 문제는 두 번째 항목인 구경 감소(Sub-calibre)입니다. 일반적으로 구경 감소탄은 날리안정분리철갑탄(APFSDS) 같은 관통자가 구경보다 작은 탄을 가리킵니다. 실제 적 전차를 관통하는 투사체가 탄두 구경보다 작아서 문자 그대로 '구경 감소'인 거죠.


문제는 독일제 Pzgr.40/43 APCR탄은 APFSDS탄과 구조가 다르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88밀리미터 판처그라나트파트로네 40/43(8,8 cm Panzergranatpatrone 40/43)입니다. Pzgr.39/43 APCBC탄과 구조상 큰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구경 감소탄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구경 감소탄은 운동 에너지탄의 일종으로, APCR탄이 운동 에너지 증가탄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점을 지니고 있지만, 구현 방식이 다릅니다.


일단 Sub-calibre라는 용어 자체도 그렇고 운동 에너지 증가탄이라는 특징을 싸잡아서 구경 감소탄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왜 옌츠 영감이 Sub-Calibre라는 용어를 사용한 건지 뇌무게 25그램인 저로서는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텅스텐 탄심을 이용한 운동 에너지 증가탄이라는 의미는 1번과 3번 항목으로 설명이 됩니다. 옌츠 영감이 Sub-calibre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일단 전 Pzgr.40/43의 투사체가 일반적인 철갑탄보다 가볍기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Pzgr.40/43의 투사체는 Pzgr.39/43의 투사체 절반 정도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양이 머리로 이해한 건 Pzgr.40/43이 "탄속이 빠르고, 탄자가 가벼운 그리고 텅스텐 탄심을 가진 탄"입니다.


다만 Sub-calibre의 적절한 용어 번역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탄자 무게 감소'라고 하면 적절할 것 같기는 한데, 이미 한 번 삽질을 한 경험이 있는지라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제504 공수 연대의 장렬한 발 강 도하와 그와 관련된 쟁점들

1944년 9월 20일 짐 개빈(제임스 J. 개빈의 애칭) 준장의 미국 제82 공수 사단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예하 제505 및 제508 공수 연대가 네이메현 남동쪽에서 라이히스발트(Reichswald) 방면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독일군을 상대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수행 중이었고, 제504 공수 연대는 네이메헌(nijmegen) 시를 방어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예하 부대의 드랍존(DZ)과 랜딩존(LZ)으로 사용된 강하지점은 보급물자 투하지점으로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영국 제30 군단의 진격로 확보가 문제가 아니었다. 네이메헌 남동 지구를 빼았긴다면 미국 제82 공수 사단은 주요 병참선이 차단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같은 날 0800시 잡다한 병력으로 구성된 독일 3개 전투단이 미국 제505 및 제508 공수 연대의 방어선을 밀어내고 네이메헌 근방 마을 3개를 점거했다.


무너지는 휘하 사단의 방어선을 지켜본 미국 제82 공수 사단장 개빈 준장은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당장 네이메헌 다리를 돌파해야 한다고, 영국 제30 군단장 호록스 중장과 영국 근위 기갑 사단장 어데어 상급대령(진)에게 강력하게 주장했다. (앨런 어데어 준남작은 1942년 9월 21일 소장 대우를 받는 상급대령(Brigadier)으로 승진, 1943년 9월 21일에는 임시 소장으로 승진, 1946년 7월 26일에 마침내 정식으로 소장에 임명되었다.)


이미 전날인 9월 19일부터 개빈 준장은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독일군의 전력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아른험에서 고군분투 중인 영국 제1 공수 사단보다 자신의 사단을 더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드랍존을 빼앗긴 경험이 있는 개빈 준장은 네이메헌 지구의 독일군이 더 증강되기 전에 무조건 발(Waal) 강을 돌파해야 한다고 상급 부대에 지속적으로 진언했던 것이다.


영국 근위 기갑 사단 선견대가 다리를 직접 가로지르는 건 불가능했기에, 13시 30분 미국 제82 공수 사단 제504 공수 연대의 도강이 준비되었다. 하지만 보트의 조달이 늦어 작전은 1500시로 연기되었고, 볼품없는 영국제 보트가 뒤늦게 도착했다. 대낮의 적전도강에 동원된 것은 미국 제504 공수 연대 3대대와 1대대였다.


익숙하지 영국제 보트를 처음 타보는 미국 강하병들은 노가 모자라 자신의 총으로 노를 저어야 했고, 400미터에 이르는 발 강을 독일군의 기관총, 박격포, 곡사포 세례를 맞으며 건너야 했다.


타이푼 전폭기 8대의 폭격과 15분 간의 준비 포격 후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제504 공수 연대의 대낮 적전도강이 개시되었다. 제504 공수 연대 3대대가 선봉에 섰고, 1대대가 그 뒤를 따랐다. 2대대는 영국 근위 기갑 사단 선견대와 함께 발 강 남단에서 도강하는 아군을 지원했다.


독일 측의 네이메헌 다리 수비대와 오일링(Euling) 전투단이 도강하는 미국 강하병들을 도륙했지만, 상당한 피해를 감수하고 제504 연대 3대대는 발 강 북쪽 제방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후에도 엄폐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개활지 200미터를 더 나아가야 했다. 미국 강하병들은 눈물이 날 거 같았지만, 이미 이판사판인 상황이었다. 미국 제504 공수 연대 3대대 병력들은 독일 오일링 전투단 소속의 돌격포와 근방에 배치돼 있던 88밀리 대공포의 포격을 뚫고 다리 북단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1700시 제504 공수 연대 3대대가 마침내 네이메헌 철교를 장악했다. 그리고 4시간이 넘는 제504 공수 연대의 장렬한 전투에 마침내 종지부가 찍혔다. 18시 30분 영국 척탄병 근위 연대 제1 차량화 보병 대대 소속 1개 중대가 다리를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뒤이어 척탄병 근위 연대 제2 전차 대대 소속의 셔먼들이 다리를 건너 북단의 독일군을 일소했다.


영국 제1 공수 군단장 브라우닝 중장은 제30 군단장 호록스 중장과 함께 이러한 미국 제504 공수 연대의 장렬한 돌격을 바라보며 "이렇게 용맹한 병사들은 처음 보는군."이라고 외쳤다. 이러한 그의 감상과는 별개로 도강을 감행한 병사들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린 지휘부를 극도로 저주했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광기에 젖은 돌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쨌든 1944년 9월 20일 19시 15분 네이메헌 다리 북단에 교두보가 형성되었다. 이제 17킬로미터만 더 진격하면 아른험 철교였다. 하지만 영국 근위 기갑 사단 선견대는 다리 북쪽에 주저앉았다.


미국 제504 공수 연대장 루벤 터커(Reuben Tucker) 대령은 영국 척탄병 근위 연대 제2 전차 대대 소속의 한 근위 소령을 찾아가 "아른험에서 자네 나라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네, 얼른 구출하러 떠나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휘하 연대 병사들이 '자살 도강' 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터커 대령은 이러한 영국 척탄병 근위 연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연대장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제504 공수 연대 소속 한 중대장이 톰슨 기관단총으로 영국 근위 기갑 장교를 위협한 사건이 벌어진 것 또한 이 때였다.


다음날 아침, 화를 삭이지 못 한 터커 대령이 사단장 개빈 준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새끼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지금 12시간 넘게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다. 저 새끼들이 차나 쳐마시면서 노는 거 보이십니까?" 발 강을 도강하면서 미국 제504 공수 연대가 입은 막대한 손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터커 대령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미국 제504 공수 연대의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는 발 강 도하는 전사에 길이 남을 장렬한 장면이었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터커는 부하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휘하 대대를 지원해 진격 재개를 제안했지만, 이 요구는 묵살되었다.


당시 SS 제10 기갑 사단장 하인츠 하르멜 SS소장은 몇 대의 전차와 한줌의 병력을 가지고 엘스트─아른험 도로 측익에 위치한 레선(Ressen) 및 베멀(Bemmel)에서 부대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제504 공수 연대의 지원을 받은 영국 근위 기갑 사단 선견대는 9월 20일 1900시와 9월 21일 24시 사이 독일군의 방어가 취약해진 엘스트─아른험 도로를 충분히 돌파할 수 있었다.


마켓가든 작전의 진행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한 지도
클릭하면 확대 가능



그리고 이와 함께 쟁점이 된 것은 영국 제8 군단장 리차드 오코너 중장의 무능함이었다. 당시 영국 제30 군단의 측면 지원을 담당했던 오코너 중장의 제8 군단은 독일 제1 강하엽병군의 가중되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영국 근위 기갑 사단과 제43 보병 사단의 측면을 제대로 엄호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작전 실패 후 먼트거머리 원수는 오코너 중장을 극렬히 비난했다.


영국 근위 기갑 사단 본대와 제43 보병 사단이 진격을 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었던 것은 오코너 중장의 제8 군단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9월 20일 독일 제107 기갑 여단이 허술한 방어선을 비집고 들어와 미국 제101 공수 사단에 통타를 가했다.


다만 문제는 과연 오코너 중장이 영국 제30 군단의 우익을 용이하게 지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병력을 제공받았으냐 하는 점과 그렇지 않았더라도 영국 근위 기갑 사단이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른험 교량을 확보할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오코너 중장이 실제로 무능했는가 하는 점과 영국 근위 기갑 사단의 늑장이 작전 실패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쟁점이 되고 있다.


덧붙여, 먼트거머리 원수는 제30 군단장 호록스 중장을 비난했으며, 제8 군단장 오코너 중장에게는 아예 혹평을 가했다. 후에 자신에게도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 책임이 일부 있다곤 했지만, 가장 큰 책임은 아이젠하워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이 때의 영향과 이어진 오버를론(Overloon) 전투의 실패 때문인지 1944년 11월 오코너 중장은 제8 군단장에서 해임돼 시쳇말로 물먹는 자리로 밀려났다. 일각에서는 먼트거머리 원수의 '싫은 놈 찍어내기'로 보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참고문헌>
Michael Reynolds, Sons of The Reich: II Panzer Corps, Normandy, Arnhem, Ardennes, Eastern Front (Casemate 2004)
Wilhelm Tieke, In the Firestorm of the Last Years of the War, II. SS-Panzerkorps with the 9. and 10. SS-Divisions "Hohenstaufen" and "Frundsberg" (J.J Fedorowicz 1999)
Marcel Zwarts, German Armored Units at Arnhem September 1944 (Concord Publication Co. 2003)
Robert J. Kershaw, It Never Snows in September: The German View of Market Garden and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1944 (Ian Allan Publishing Ltd 2001)
Stephen Badsey, Arnhem 1944: Operation Market Garden (Osprey Publishing 1995)
http://www.pegasusarchive.org/arnhem/frames.htm
http://www.historyofwar.org/scripts/fluffy/fcp.pl?words=O%27Connor&wt=ew&bl=or&d=/battles_arnhem.html

공세 시 우익 담당은 하지마라.

1943년 치타델레 작전 실패 후
만슈타인: 켐프, 너 기갑대장은 농담 따먹기 해서 달았냐? 제4 기갑군 우익 엄호 제대로 못 해!
켐프: 그럼 전차를 더 주시든가 (...)


1944년 마켓가든 작전 실패 후
먼트거머리: 오코너, 너 때문에 우익 방어가 부실해서 제30 군단이 진격을 제대로 못한 거야!
오코너: 그럼 병력을 더 주시든가 (...)




오래된 떡밥이자 여전히 논쟁이 되는 떡밥들입니다.
독일 켐프 분견군 사령관 베르너 켐프는 만슈타인 영감에게
영국 제8 군단장 리처드 오코너는 먼트거머리 영감에게
각자 신나게 까였습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하는 거지만,
확실한 건 공세에서 우익이 참 어렵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의 교훈은 공세 시 우익 지휘관이 되지 말자가 되겠습니다. (응?)



추신: 고향 가기 전에 작업 끝내야 하는데, 계속 딴짓만 하네 -_-;






"상사가 히스테리를 일으키기 전에 면피용 멘트를 준비해 두십시오.
그것이 정년 보장의 지름길입니다."


영국 근위 기갑 사단 때문에 마켓가든은 실패했다?

누가 삽집을 덜 하냐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데, 이는 마켓가든 작전에도 적용됐기에 작전계획 자체는 분명 그럴싸했습니다. 게다가 네이메헌 다리 확보 후 영국 근위 기갑 사단의 이해할 수 없는 대기는 여전히 강력한 떡밥입니다.


9월 20일 1900시 미국 제82 공수 사단 제504 연대가 발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확보했는데, 영국 근위 기갑 사단 선견대인 척탄병 근위 연대와 아일랜드 근위 연대로 구성된 전투집단이 보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리를 건넌 후 엘스트 근방에서 대기하며 12시간 이상 허비했습니다. 당시 미국 제504 공수연대 병력 일부와 함께 그냥 아른험으로 밀고 갔으면 됐는데 말입니다.


9월 20일 1900시~9월 21일 0000시까지 무려 5시간 동안 엘스트와 아른험 사이에 독일군 수비병력이 없다시피했죠. 따라서 보병지원은 따로 필요 없었습니다. 이때 영국 근위 기갑사단 선견대가 밀어부쳤으면 아른험 다리를 확보할 수 있었죠.


영국군 예비역 소장인 마이클 레이놀즈 영감은 이런 삽질을 하게 된 경위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며 자신의 저서에서 짜증을 냈죠. 먼트거머리 원수의 그럴싸 한 작전계획이 이로 인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됐으니 말이죠.


당시 척탄병 근위 연대와 아일랜드 근위 연대로 구성된 영국 근위 기갑 사단 선견대가 그 중요한 5시간 동안 주파해야 했던 거리는 고작 18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얘기로 정말 깝깝해서 그러는데 먼트거머리 원수 실드치는 데 가끔 이용되기도 하는 마켓가든 작전의 성패에 치명적으로 작용한 이 5시간에 관한 얘기를 아는 분 없으신 겁니까. 아니면 알고도 먼트거머리 원수를 까기 위해 모른 척들 하시는 겁니까. 이 이야기는 마켓가든 작전을 다룬 서적이라면 꼭 한 번은 언급됩니다. 당시 미국 제82 공수사단 제504 연대 한 중대장이 이성을 잃고 톰슨 기관단총으로 영국 기갑 장교를 위협한 채 "XX 새끼들아, 가서 너네 강하병들 구하라고!"라고 하며 빨리 아른험으로 이동하라고 윽박을 질렀습니다.


아른험까지 18킬로미터도 채 안 남았는데, 왜 진격을 안 하냐고 여타 미국 제504 공수연대 장교들도 닥달을 했지만, 돌아온 답은 "보병 지원 없이 이동하지 않겠다."였죠. 이게 쟁점이 된 이유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네이메헌 교량 돌파 직후 5시간 동안 아른험으로 통하는 도로가 비어있었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먼트거머리 원수의 작전은 영국 근위 기갑 사단의 삽질 때문에 실패했다는 떡밥이 등장한 거죠. 역적으로 지목된 건 고색창연한 이름을 가진 전통있는 영국 연대인 아일랜드 근위 연대와 척탄병 근위 연대입니다.


이 떡밥 때문에 먼트거머리 원수의 마켓가든은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거죠.







"오메, 장갑묘 복장 터져 죽겠소."


무능하기 짝이 없는 먼트거머리 원수?

제가 고양이 놀이하는 것도 스스로 이해가 안 되지만, 코넬리우스 라이언 영감의 판타지 소설(독일 측 한정)인 《A BRIDGE TOO FAR》를 읽고 먼트거머리 원수를 바보 취급하는 풍조가 여전히 바뀌지 않았더군요. 먼트거머리 원수가 기갑전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도가 낮고 전술적으로는 범용하지만, 전략적 혹은 작전술적 관점에서는 뛰어난 지휘관입니다.


마켓가든 작전을 입안한 이유 중에 자신의 공적 쌓기라는 불순한 목적이 분명 포함돼 있었지만, 원수 계급장을 지닌 영국군 최고 야전 지휘관으로서 버나드 먼트거머리 영감은 정부와 총사령부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던 데다가, 연합국 내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생각해서 영국군이 주도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종결시키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수라는 지위는 정치적인 안배까지 고려해야 하는 자리였죠.


그래서 서방 연합군의 수송능력과 보급력을 넘어선 마켓가든 작전을 입안해 1944년 안에 대전을 종결지으려 했죠. 위험하지만 성공하면 독일군의 라인 강 방어선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매력적인 초장거리 종심 돌파 작전이었죠.


그리고 이 작전을 입안하기 전에 먼트거머리 원수는 네덜란드에 주둔한 독일 기갑부대의 전력을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독일 측 자료에 의하면, 마켓가든 작전 직전 아른험 근방에서 재편성과 휴식을 취하고 있던 비트리히 SS대장 휘하 제2 SS 기갑 군단 소속의 두 무장 친위대 사단인 호엔슈타우펜 사단과 프룬츠베르크 사단의 전차 전력은 이하와 같습니다.



제9 SS 기갑 사단 호엔슈타우펜
판터 3대
4호 구축전차 2대


제10 SS 기갑 사단 프룬츠베르크
판터 8대
4호 전차 12대
3호 돌격포 4대




<출전>
Marcel Zwarts, German Armored Units at Arnhem September 1944 (Concord Publication Co. 2003) 4p




노르망디 전투와 이어진 서방 연합군의 대규모 추격전에서 다대한 피해를 입은 두 무장 친위대 사단은 궤멸 직전까지 몰렸고, 빌헬름 티케 영감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9월 중순 두 무장 친위대 사단은 사단 당 6,000~7,000명의 인원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두 사단은 사단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하고 경보부대와 전투단으로 찢어져 있었죠.


과거 무장 친위대 부사관이었던 티케 영감은 코넬리우스 라이언 영감의 저서를 읽고 심기가 많이 불편해졌습니다. 먼트거머리 원수를 바보 취급한 것 때문이 아니라, 호엔슈타우펜과 프룬츠베르크 사단의 전력을 과장하고 하인츠 하르멜 SS소장과 발터 하르처 SS상급대령의 라이벌설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냈기 때문이죠. 그래서 티케 영감은 자신의 저서 《In the Firestorm of the Last Years of the War》에서 마켓가든 작전 관련 부분을 주석으로 도배까지 해가며 라이언 영감을 비판했습니다.


구 무장 친위대원인 티케 영감의 분노가 엿보이죠. 제가 언급한 티케 영감의 저서는 독일어 원판이 1975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후 티케 영감의 저서를 참고한 서방 측 출판물이 다수 출간되었습니다.


아른험에서 싸운 티거 부대에서 알 수 있듯이 만약 먼트거머리 원수의 계획대로 됐다면 티거 부대가 오기 전까지 아른험 철교에 영국 근위 기갑 사단이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작전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먼트거머리 원수의 잘못된 독일 기갑부대 전력 평가가 아니라, 수송능력과 보급력의 한계를 넘어선 작전거리와 독일 측의 신속한 대응입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 영국 제1 공수 사단 전체를 작전 첫날 모두 강하 시킬 수 있었다면, 한줌 밖에 되지 않는 무장 친위대 기갑 사단의 전차들을 무시하고 아른험 철교를 확실히 점거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충분한 수송능력과 보급력을 발휘 가능했다면 만신창이 상태였던 제2 SS 기갑 군단 따위는 큰 위험요소가 될 수 없었다는 거죠. 영국 제1 공수 사단 병력 1만 명이 첫날 강하 완료 후 이틀째 쯤에는 아른험 시가지와 다리를 확보하고 도시 주변에 방어선을 둘러쳤으면 실제 역사처럼 궤멸당하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마켓가든 작전을 위해 서방 연합군이 동원할 수 있었던 항공기는 제한적이었고, 미국 제82 및 제101 공수 사단도 수송기 부족으로 연대 단위로 축차 투입돼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먼트거머리 원수는 서방 연합군의 수송능력과 보급력을 과신했고, 그러한 기반 위에 세워진 마켓가든 작전은 크나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죠. 천조국의 막강한 보급능력을 고려하면, 어째서 먼트거머리 원수가 그러한 과신을 바탕으로 작전을 계획했는지 이해는 가지만, 작전이 실패하고 무익하게 많은 피를 흘렸으니 비판을 면할 도리가 없죠.


특히 죽을 힘을 다해 주요 다리를 확보하고 유지한─그리고 그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입은─영미군의 강하병들은 먼트거머리 영감을 찢어죽이고 싶었겠죠. 게다가 먼트거머리 영감은 어그로 끄는 데 귀재인지라 "마켓가든 작전은 90% 성공했다."는 희대의 캣드립을 치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끝으로, 먼트거머리 원수와 마켓가든 작전에 관한 논란은 몇 년 전에 (구)페리스코프 포럼에서 결론이 났는데(당시 난리도 아니었죠), 어째서 아직도 라이언 영감의 주장이 진실처럼 퍼져있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외모와 성격은 상관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참고문헌>
Wolfgang Schneider, Tigers in Combat Vol.1 (Stackpole Books 2004)
Wolfgang Schneider, Tigers in Combat Vol.2 (Stackpole Books 2005)
Jacek Solarz, Tiger in Action 1944 Vol. 2 (Wydawnictwo Militaria 2008)
Stephen Badsey, Arnhem 1944: Operation Market Garden (Osprey Publishing 1995)
Thomas L. Jentz, Panzertruppen 2: The Complete Guide to the Creation & Combat Employment of Germany's Tank Force 1943-1945 (Schiffer Publishing 2000)
Wilhelm Tieke, In the Firestorm of the Last Years of the War, II. SS-Panzerkorps with the 9. and 10. SS-Divisions "Hohenstaufen" and "Frundsberg" (J.J Fedorowicz 1999)
Michael Reynolds, Sons of The Reich: II Panzer Corps, Normandy, Arnhem, Ardennes, Eastern Front (Casemate 2004)
Marcel Zwarts, German Armored Units at Arnhem September 1944 (Concord Publication Co. 2003)
Robert J. Kershaw, It Never Snows in September: The German View of Market Garden and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1944 (Ian Allan Publishing Ltd 2001)
http://www.pegasusarchive.org/arnhem/frames.htm

잔혹한 쾨니히스티거에 관한 진실

일단 마이바흐 HL 230 P30 엔진의 최대출력은 오기로 잠정적인 결론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또다른 독일 전차 연구의 귄위자인 슈필베르거 영감의 저서에 동 엔진의 출력이 700hp로 표기돼 있는 데다가, 옌츠 영감도 자신의 저서에 700hp와 750hp를 병용 표기했기 때문입니다. 잠정적이라는 전제가 붙지만 일단은 옌츠 영감의 오기였던 거죠. 열렬한 빠심 때문에 제가 간과한 부분이죠.


엔진 튜닝이나 질 좋은 연료로 물론 출력을 약간 더 뽑아낼 수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라 볼 수 없겠죠. 따라서 일반적인 티거Ⅱ의 최대출력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700마력으로 보는 게 맞겠죠.


이외도 제가 열렬한 빠심 때문에 무시하는 쾨니히스티거의 현실을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1. 쾨니히스티거의 최대 포탄 적재량


세간에 '포르셰 포탑'으로 잘못 알려진 '크룹 사의 초기형 포탑'을 탑재한 초기형 쾨니히스티거는 일반적으로 포탄 적재량이 80발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까요?



1944년 8월 12일: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공격을 중지. 운용 가능한 전차는 8량으루 줄어듦. 오글렌두프 마을 근방에서 소련 제53 근위 전차 여단 소속 T-34/85의 매복에 쾨니히스 티거 수 대가 격파당함(이 중 3대는 완전 손실). 포탑 관통으로 인한 탄약 유폭으로 승무원이 떼죽음당함. 이후 포탄 탑재수를 68발로 줄이고 88밀리미터 포탄을 포탑에 쌓아두는 행위를 금지. 당일 대대 보유 전차는 42대. 1중대가 대대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오르트루프에서 기차에 탑승.




<출전>
Wolfgang Schneider, Tigers in Combat Vol.1 (Stackpole Books 2004) 46p




좌절스러운 쾨니히스티거의 데뷔전에서 인용했던 내용입니다. 크룹 사 초기형 포탑을 장비하고 동부전선에 최초 투입된 독일 제501 중전차 대대 쾨니히스티거들이 '매복왕 오스킹'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 무참하게 썰렸는데, 이 때 88밀리미터 포탄을 12발 정도 우겨넣고 포탑 여기저기에 쌓아놓고 있다가 탄약 폭발로 2대가 유폭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어처구니없이 귀중한 티거 전차병들을 잃을까봐 포탄 적재량을 줄인 거죠. 따라서 쿠룹 사 초기형 포탑을 탑재한 쾨니히스티거의 경우는 68발, 양산형 포탑인 크룹 사 제리엔 포탑(Serienturm)을 얹은 쾨니히스 티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적정 적재량이 68발이었습니다. 제리엔 포탑은 16발 정도를 포탑 안에 늘어놓을 수 있었고 이 경우 총 84발을 적재 가능했습니다. 제리엔 포탑 탑재형 쾨니히스티거도 포탑 안에 포탄을 늘어놓고 다니는 경우는 '대참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죠.


1944년 11월 헨셀 사에 의해 탄약고 설계 개선안이 제출되었고, 이로 인해 12발이 문제없이 추가 적재가능해졌습니다가 아니라 정확히는 가능해질 뻔했습니다. 80발 적재 덕후 집단인 독일 병기국 6과의 집요한 요구 때문에 탄약고 개수 계획이 일단 세워졌지만, 이는 종전으로 인해 계획만으로 끝났습니다.


단, 지침과는 상관없이 급박한 전선상황으로 인해 여유롭게 재보급을 받을 수 없었기에 많은 경우 지시를 무시하고 일선 부대에서는 마구잡이로 포탑에 포탄을 쓸어담았을 걸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무게 증가로 인한 기동성 저하와 구동계의 부하를 이유로 대전 후반에 일선 부대에서 쉬르첸을 임의로 떼고 다녔고, 판터에 추가된 출력 리미터도 기동성 확보를 위해 해제되기 일쑤였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맘대로 하고 죽겠다는 거죠. 뭐 사실은 살아남고 싶어서 택한 독일 전차병들의 궁여지책이었지만 말입니다.







2. 유명무실한 고속 구경 감소탄 Pzgr.40/43


일반적으로 쾨니히스티거에 의해 사용된 APCBC탄 Pzgr.39/43보다 관통력이 훨씬 뛰어난 APCR탄인 Pzgr.40/43탄은 탄자심으로 텅스텐심을 이용했고, 이는 러시아 중(重)전차와 중(重)대전차 자주포를 상대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극소량을 적재하고 다녔는데, 문제는 대전말기 천연자원이 극도로 부족해진 독일은 텅스텐의 부족으로 APCR탄을 생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탄의 재고 자체가 거의 없었죠. Pzgr.39/43만 해도 적 중전차를 상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어쨌든 선택의 폭이 좁아진 것은 사실이고 이 때문에 Pzgr.40/43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죠.







3. 쾨니히스티거, 서부전선에서 전멸하다


옌츠 영감의 저서 《Germanys Tiger Tanks: Tiger I & Tiger II》에 따르면 일시적이긴 하지만 1944년 8월 30일 서부전선의 티거 가동대수는 0대 즉 0%입니다. 1944년 8월 30일 서부전선의 독일 기갑부대는 티거Ⅰ 및 티거Ⅱ 122대 모두를 완전손실했습니다. 그에 따라 8월까지 45대(+?대)가 전선에 배치된 것이 확인된 쾨니히스티거 또한 거의 전멸했습니다.


1944년 3월 14일 독일 제316 무선조종전차 중대가 크룹 사 초기형 포탑이 탑재된 티거Ⅱ 5대를 수령했으나 이 모두가 초기형이라 심각한 기계적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전선의 혼란 때문인지 서적마다 이 부대는 편성이 크게 다릅니다. 일단 확실한 것은 노르망디 상륙 전에 제316 무선조종전차 중대가 티거Ⅱ 5대와 하이브리드 티거라 불리기도 하는 리퍼 티거Ⅰ3대를 가지고 있었고, 이후 형식 불명 전차 몇 대와 돌격포를 수령했습니다. 제316 무선조종전차 중대 소속 쾨니히스티거 13번, 12번, 11번, 10번, 02번이 유기 및 폭파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추가로 제101 SS 중전차 대대가 쾨니히스티거를 7~8월 14대를, 제503 중전차 대대가 6~8월 26대를 수령했습니다. 이 대부분이 팔레즈 포위환과 센 강 우안에서 자폭 혹은 유기되었습니다. 1944년 8월 30일자 보고에 따르면 제101 SS 중전차 대대 티거 전량 손실 후 궤멸, 제503 중전차 대대 또한 전량 손실 후 궤멸했습니다. 특히 제503 중전차 대대 3중대가 가장 안습한데, 7월 말에 수령한 쾨니히스티거Ⅱ 14대 중 12대를 한 달 사이에 다 잃었습니다. 나머지 2대만 독일 본토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죠.


1944년 8월 18일자 보고에 따르면 7월에 제302 무선조종전차 대대 1중대로 개편된 제316 무선조종전차 중대 또한 티거를 대부분 잃고 후방으로 빠져 동부전선으로 전속되었습니다.


제316 무선조종전차 중대는 기갑교도 사단에 일시 예속돼 편제상 쾨니히스티거 14대를 수령하기도 돼있었습니다. 위에 언급된 5대 외에 추가로 더 받았는지는 불명입니다. 1944년 8월까지의 서부전선 쾨니히스티거 수가 45+@대라는 수치가 나온 건 이 때문이죠. 다만 1944년 2월과 8월 사이 보충군과 병기국으로 쾨니히스티거 12대가 발송 예정이었기에, 이 12대가 실제로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기갑총감의 명령에 따르면 1944년 2월에 기갑교도 사단에 5대가 발송돼야 했는데, 당시 기갑교도 사단에 임시 예속돼 있었던 제316 무선조종전차 중대가 이 5대의 쾨니히스티거를 수령한 건 3월 14일이었습니다.


발송 명령서 발부와 실발송(및 실수령)은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었죠.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이러한 시간적 격차는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죠. 어쨌거나 노르망디 전투와 이후 8월 말 추격전에서 대략 쾨니히스티거 40대 가량을 서부전선에 그 철골을 묻고 관련 부대는 모두 궤멸했습니다.


끝으로, 이하는 기갑교도 사단에 임시 예속돼 있었던 독일 제316 무선조종전차 중대 소속의 쾨니히스티거의 잔해입니다. 순서대로 13번, 12번, 11번, 02번, 10번(2장)입니다.

















<사진 출처>
http://forum.axishistory.com/viewtopic.php?t=19525&postdays=0&postorder=asc&highlight=fkl316&start=120



서부전선에서 발생한 판터 쇼크와 그 원인

판터에 대한 서방 연합군의 잘못된 평가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은 자군이 파괴하거나 독일군이 방기한 다수의 판터를 수거해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1943년 가을 소련군은 이 수복된 판터 초기형 전차들로 수많은 시험을 하였고, 그 정보가 당시 소련을 방문한 서방 연합군 정보부에 전해졌다. 소련을 직접 방문해 그 자료들을 직접 전해받은 영연방군 및 미군 장교들에 의해 판터에 관한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판터에 관한 최초의 기술적 공식 보고서는 서방 연합군 정보부에 의해 1943년 9월 26일 작성됐고, 이후 다수의 관련 보고서가 서방 연합군 사령부에 제출되었다. 소련군은 충분한 기술적 자료를 제공했지만, 일단 그 대상이 잘못되었고 서방 연합군 정보부가 이 자료를 분석하고 판터에 관한 평가를 내리는 데 오류가 발생했다.


소련군이 당시 수거한 판터는 기술적인 부분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판터 D형이었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카를 데커 대령이 지휘했던 독일 제10 독립 기갑 여단에 배속된 이 판터 D형은 초기 결함들로 인해 집결지로 이동하던 중에 유폭하는 등 신뢰성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이러한 판터의 문제점은 소련군이 제공한 기술 보고서에 반영이 돼 있었다. (판터 초기형의 문제점과 전과에 대해서는 치타델레에서의 판터 전차를 참조하라.)




<출전: Thomas L. Jentz, Germany's Panther Tank: The Quest for Combat Supremacy, 132p>

* 주의: 7월 8일 판터 가동대수는 0대가 아니라, 독일 제10 기갑 여단의 보고서가 누락된 탓에 정보 자체가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부득이 0으로 표시했다. 따라서 실제로는 불명이다.




치타델레 작전 개시 당일인 1943년 7월 5일 독일 제10 기갑 여단의 판터 D형의 가동수는 184대였지만, 이틀 후인 7월 7일 40대로 격감했고, 7월 9일에는 16대까지 떨어졌다. 이 중 태반이 기계적 손실로 독일 측 공세 종료일인 7월 16일 판터 D형의 가동대수는 43대에 지나지 않았다. 7월 5일부터 7월 16일까지 독일 제10 기갑 여단의 평균 판터 가동대수는 55.72대로 작전 초기를 제외하면 실제 가동율은 30%가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1943년 8월부터 12월까지 평균 200대 전후로 비교적 소수의 판터를 운용했다. 이는 7월과 큰 차이가 없는 수치였으며, 8월~12월 판터 가동율도 쿠르스크 전투 당시처럼 매우 낮았다. 이에 따라 서방 연합군 정보부는 판터 D형을 '결함 전차'로 평가하고 티거처럼 독립 전차 대대나 독립 기갑 여단에 배속돼 소수만이 전선에 투입될 것이라 판단했다. 이러한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들어 실제로 이탈리아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판터 전차는 소수였다.







심화되는 편견과 그 대가


1943년 8월에 판터 71대를 장비한 LSSAH 사단이 북부 이탈리아로 이동했지만, 위장 야전군인 제1 SS 기갑군(제2 SS 기갑 군단의 위장 명칭)에 속해 파르티잔 토벌 임무와 이탈리아군 무장해제 임무만을 수행했다. 그리고 서방 연합군과 일체 교전없이 동년 11월 제48 기갑 군단에 전속돼 동부전선으로 돌아왔다. 이후 독일 제69 특수 기갑 연대 소속의 제4 기갑 연대 1대대가 판터 76대를 장비하고 1944년 2월에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독일 제69 기갑 연대는 소방대로써 편성된 특수목적부대로 1944년 2월 당시 4개의 전차 대대와 1개 중전차엽병 중대로 구성돼 있었다.


독일 제69 기갑 연대가 서방 연합군을 지중해로 쓸어넣기 위해 이탈리아 전선에 오기 전까지 미군은 판터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방 연합군 정보부는 결함 전차인 판터 D형을 독일군이 전차 부대의 근간으로 삼을 리 없다고 판단했고, 이에 관한 보고서는 당연히 미국 지상군 사령관인 레슬리 맥네어 중장에게도 보내졌다. 당시 서방 연합군 정보부는 독일 기갑 사단의 편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제기된 것은 '정보 보고서 47번'이 올라온 1944년 2월 22일이었다. 이 보고서에 독일 기갑 사단의 1944년 편제에 판터가 1개 대대를 차지하고 있다는 명확한 정보가 포함돼 있었다. 대참사에 대한 암시가 포함된 이 보고서를 미군 고위 지휘관들은 무시했다.


미 유럽 원정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대장, 미 지상군 사령관 맥네어 중장, 미 제12 집단군 임시 사령관 겸 제1군 사령관 오마 브래들리 중장 등 미군 수뇌 중 어느 누구도 이 보고서에 주목하지 않았다. 서방 연합군 정보부가 1944년 초에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했지만,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높으신 분들'이 이 보고서에 주목하게 된 것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로 셔먼이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판터에게 고장난 압력밥솥처럼 터져나간 이후이다. 미군은 1944년 7월 21일부터 8월 20일까지 셔먼만 557대를 잃었다. 이는 당시 미군이 보유한 셔먼 중 21.8%를 차지하는 양이었다. 한 달의 전투 기간 동안 미국 유럽 원정군은 3개 기갑 사단 분의 셔먼을 완전손실했던 것이다.


노르망디에 투입된 미국 기갑 사단들은 건제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대량으로 셔먼을 손실했고(실제로는 건제를 유지했다. 이유는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막대한 예비 셔먼의 존재였다.), 노르망디 전투가 종료된 후 사단 내에서 중고 셔먼은 품귀 현상을 일으켰다. 전투가 종료된 후 대부분이 신품으로 교체돼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따라 숙련된 미국 전차병들 또한 신병으로 교체되었다.







아무도 두 거인을 비판할 수 없었다



"자네 말은 우리의 76이 이 판터들을 격파하지 못한다는 뜻인가? 이런, 나는 이 포가 이번 전쟁에서 죽여주는 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브래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아, 이게 75보다 낫긴 합니다만, 신형 탄두는 훨씬 작습니다. 이 탄두는 독일 전차의 (전면)장갑을 뚫지 못하지요."


아이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투덜거렸다.


"왜 나는 항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 뒤늦게 알게 되는 건가? 병기국에서는 나한테 75는 독일놈들이 가진 것은 모조리 잡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지금은 자네로부터 76은 저 빌어먹을 것들을 박살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구만."




<출전>
브래들리 자서전, 322-323p 1951년판




이건 명백한 면피다. 늦긴 했지만 분명 서방 연합군 정보부는 노르망디 상륙 전에 경고했다. 독일이 자군의 기갑 사단에 판터를 대량으로 배치하고 있다고 말이다. 추가된 판터에 관한 기술적 보고서가 없었어도, 이는 독일군이 판터의 결함을 해결했다는 의미였고, 당연히 노르망디 상륙에 앞서 서방 연합군 최고 지휘관인 아이젠하워와 미군 최고위 야전 지휘관인 브래들리는 이 사안에 관해 심각하게 논의를 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은 병기국 탓을 하며 독일 전차의 강력함을 뒤늦게 알게 됐다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브래들리 원수와 아이젠하워 원수
감히 누가 이 두 거인을 비판할 수 있었겠는가.





서방 연합군 정보부는 노르망디에서의 대참사를 예언했지만, 트로이의 몰락을 예언한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처럼 미군 수뇌부에게 무시당했다. 독일은 판터 D형의 초기 결함을 해결한 판터 A형을 1943년 8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는 동년 9월부터 본격화되었다. 1943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된 판터 A형과 이듬해 3월부터 생산된 판터 G형은 정밀도 및 관통력이 높은 주포와 강고한 정면 장갑으로 문자 그대로 셔먼을 유린했다.


1945년 3월 20일자 판터 쇼크에 관한 보고서는 셔먼 전차병들의 절규나 마찬가지로, 이들을 이러한 참극으로 밀어넣은 원흉 중 하나가 이 보고서의 마지막 수령자인 아이젠하워였다.


'판터 쇼크'는 독일 전차의 기술적 우위 이전에, 미군 수뇌부의 안일한 인식과 대처가 문제였던 것이다. 견인식 대전차포와 대전차 자주포 논란에서처럼 미군 수뇌부는 또다시 무능함을 드러냈다.


영연방군 또한 이러한 미군의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대처는 달랐다. 영연방군은─비록 결과는 시원치 않았지만─기술적 격차를 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고, 판터에 대응할 병기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는 소련 또한 마찬가지로 쿠르스크 전투에서 자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거둔 판터에게 크나큰 위협을 느끼고 수많은 대응책을 강구했다.




─ 판터 쇼크에 대처하기 위한 영연방과 소련의 노력으로 이어짐








<참고문헌>
Steven Zaloga, Armored Thunderbolt: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Books 2008)
Thomas L. Jentz, Germany's Panther Tank: The Quest for Combat Supremacy (Schiffer Publishing 1995)
Thomas L. Jentz, Panzertruppen 2: The Complete Guide to the Creation & Combat Employment of Germany's Tank Force 1943-1945 (Schiffer Publishing 2000)
Niklas Zettering,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Frank Cass Publishers 2004)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 (J.J. Fedorowicz 2000)
Eric Lefévre, Panzers in Normandy: Then and Now (After the Battle Magazine 1999)
George F. Nafziger, GERMAN ORDER OF BATTLE IN WW II: panzers and artillery in World War II (London, Greenhill Books 1999)
Wilhelm Tieke, In the Firestorm of the Last Years of the War, II. SS-Panzerkorps with the 9. and 10. SS-Divisions "Hohenstaufen" and "Frundsberg" (Fedorowicz J.J. 1999)
Patrick Agte, Jochen Peiper: Commander, Panzerregiment Leibstandarte (Fedorowicz J.J.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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