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8-9월 서부 전선의 상황
1944년 8월 말과 9월 초 미군 수뇌부는 직면했던 독일 전차에 대한 문제를 해결했으며, 더 이상 대규모 독일 기갑 부대가 등장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스럽게도 질풍노도처럼 진격 중인 패튼의 미국 제3군을 주목표로 독일 측이 대규모 기갑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서방 연합군의 선봉대인 미국 제3군이 독일 국경에 이르기 전에 포위, 격멸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1944년 9월 프랑스 아라쿠르(Arracourt)에서 독일 기갑 부대와 미국 기갑 부대 사이에서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졌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전투였는데, 독일 기갑 부대의 종말을 알리는 효시였다. 분명 스펙적으로는 판터가 셔먼을 상대로 확연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전차 성능의 차이가 전차전의 승패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전차병의 숙련도와 지휘관의 능력이 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쿠탕스 남동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롱시(Roncey)에서 독일 제7군과 서부기갑집단이 다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어 팔레즈 및 센 강 포위환에서 독일 B 집단군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8월 15일 지중해를 통해 제이콥 데버스 중장의 미국 제6 집단군이 상륙해 독일 제1군과 제19군을 남부 프랑스에서 몰아냈다.
미국 제6 집단군은 알자스 지방을 향해 진격했고, 버나드 먼트거머리 원수의 영국 제21 집단군은 벨기에 및 네덜란드 방면으로 진격해 지크프리트 선(서부 방벽)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빗장을 질러버릴 계획이었다. 만약 오마 브래들리 대장의 미국 제12 집단군과 데버스 중장의 제6 집단군이 알자스 지방 혹은 로렌 지방에서 조우한다면 독일은 본토를 제외한 유럽의 거의 모든 점령지를 잃게 될 터였다.
그리고 이 위협적인 공세에 선봉이 된 것이 조지 패튼 중장의 미국 제3군이었다. 미국 제3군은 파리를 지나쳐 메스(Metz)를 향해 문자 그대로 돌격을 하고 있었다. 독일 수뇌부는 패튼 중장의 빠른 진격에 크나큰 위협을 느꼈고, 패튼 중장의 주력 기갑 부대인 미국 제4, 제6 기갑 사단을 어떻게든 분쇄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서방 연합군에게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 수비부대가 항복하면서 셰르부르와 브레스트의 항구를 파괴한 건 둘째치고, 노르망디 전투 동안 벌어진 연합군의 폭격으로 프랑스의 철도 대부분이 파괴돼 보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이에 따라 9월 중순에는 원활한 진격이 불가능했고, 서방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장은 전군에 휴식과 재편성을 명령하려 했다.
더욱이 먼트거머리 원수의 영국군이 네덜란드 안트베르펀(Antwerpen) 항구를 포위하긴 했지만, 셸트(Scheldt) 강어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에 결국 항구 접수에 실패했다. 결국 이 실패의 대가를 캐다다군이 떠안아야 했고, 캐나다군은 가을 내내 셸트 강어귀의 통제권을 놓고 독일군과 이전투구를 벌였다.
이기고 있긴 했지만 서방 연합군의 상황은 의외로 좋지 않았고, 독일군이 궤멸 직전이라고 판단한 먼트거머리 원수는 아른험(Arnhem)을 통해 독일 북부로 진격한다는 초장거리 종심 돌파 작전인 마켓가든 작전을 입안했다. 아이젠하워 대장은 약간의 주의를 주고 이 야심찬 작전의 실행을 허가했다. 하지만 마켓가든 작전은 "다리가 너무 멀어서" 실패했고, 네덜란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대부분의 연료를 이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에 집중했기에 패튼의 제3군은 진격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서방 연합군 사령부 내부에서는 논쟁이 오갔다. 이젠 정말 연료가 없었다.
만토이펠과 독일 제5 기갑군
히틀러는 여전히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동부 전선에서 종종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의 판처트루펜(Panzertruppen, 기갑부대)이 승리를 안겨줄 거라 믿었다. 실제로 마켓가든 작전을 저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무장 친위대 기갑 사단들과 육군의 독립 기갑 부대들이었다.
설익고 말랑말랑하기 그지없는 미국의 기갑부대를 포위해서 격멸하겠다. 이것이 당시 히틀러의 의중이었다. 히틀러는 동부전선의 노장들과 숙련병들을 긁어모아 서부를 향한 대규모 기갑 공세를 준비했다.
1944년 9월 3일 히틀러는 서부 전구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에게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한 공세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독일 제3, 제15, SS 제17 기갑척탄병 사단 그리고 제111, 제112, 제113 독립 기갑 여단이 초기 공세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추가로 기갑교도사단, 제11, 제21 기갑 사단 그리고 제106, 제107, 제108 기갑 여단이 투입되기로 했다.
기갑전의 대가로 유명한 하소 폰 만토이펠 기갑대장이 동부전선에서 전속돼 와 독일 제5 기갑군 사령관이 되었다. 동부전선에서 제7 기갑 사단, 대독일 기갑척탄병 사단을 통해 용명을 떨친 만토이펠은 1944년 9월 1일 기갑대장으로 승진하고, 동년 9월 9일에는 군단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야전군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만토이펠 기갑대장의 독일 제5 기갑군은 패튼 중장의 미국 제3군을 분쇄할 준비를 진행했다.
마침내 독일 제5 기갑군의 기갑 역공세는 1944년 9월 12일로 날짜가 잡혔다.
이 기갑 역공세의 중핵은 신규 편성된 1944년형 독립 기갑 여단이었다. 이 부대들은 본래 1944년 여름에 '동부전선의 소방대' 역할을 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1944년형 기갑 여단은 제병합동부대라기보다는 전차와 기갑척탄병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기동타격부대였다. 독일이 기동방어나 공세 시 돌파부대로 임시 편성했던 연대 급 기갑 전투단을 상설화한 것이었다.
대부분 동부전선의 숙련병들을 기간으로 편성됐으며, 지휘관들 또한 수년 간 동부전선에서 경험을 쌓은 역전의 기갑 지휘관들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펠트헤른할레 기갑척탄병 사단의 잔존병력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독일 제106 기갑 여단이다. 여단장은 전설적인 '베케 중전차 연대'의 지휘관을 역임한 프란츠 베케 대령이었다.
단, 대다수의 인원은 신병으로 연료 부족까지 겹쳐 충분한 훈련을 하지 못했다. 이는 독일 제106 기갑 여단만이 가진 문제가 아니었다. 충분한 기갑 장비를 수령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기갑 여단이 연료와 지원 장비 부분에서 고충을 겪었다. 정비 부대도 없이 전선에 투입된 독일 제107 기갑 여단의 경우 마켓가든 작전을 저지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심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1944년 11월 해체되었다.
다수의 신병 유입과 연료난으로 인한 훈련 부족 문제 외에도 1944년형 독일 기갑 여단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역전의 지휘관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영미군과의 전투가 처음인 기갑 여단장들은 서부전선의 상황을 파악하고 휘하 부대를 통제하는 데 극도의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형 기갑 여단은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에 규모가 너무 작았고, 완벽한 제병합동부대도 아닌 탓에 포병의 지원을 받는 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더욱이 101-110번 독립 기갑 여단들은 수색 부대가 소대 급이었기에 전선 정찰에 매우 불리했다.
독일 기갑 및 기갑척탄병 사단장들은 기갑 여단장들의 지휘권을 무시했고, 이로 인해 독립 기갑 여단은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한 단순 대대 집합체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100대에 이르는 전차와 돌격포를 가진 강력한 독일의 기동타격부대는 실제로는 겉모습 뿐이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독일 제5 기갑군의 공격은 대규모 기갑 역공세가 아니라 '대규모 기갑 자살공격'이었다.
<참고문헌>
Steven Zaloga, Armored Thunderbolt (Stackpole Books 2008)
Steven Zaloga, Lorraine 1944: Patton vs Manteuffel (Osprey 2000)
Thomas L. Jentz, Panzertruppen vol.2 (Schiffer 2000)
Wilhelm Tieke, In The Firestorm of The Last Years of The War (J.J. Fedorowicz 1999)
Michael Reynolds, The Sons of The Reich (Casemate 2004)
Samuel Mitcham, Retreat to The Reich (Stackpole Books 2007)
George F. Nafziger, The German order of battle (Greenhill Books 1999)
1944년 8월 말과 9월 초 미군 수뇌부는 직면했던 독일 전차에 대한 문제를 해결했으며, 더 이상 대규모 독일 기갑 부대가 등장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스럽게도 질풍노도처럼 진격 중인 패튼의 미국 제3군을 주목표로 독일 측이 대규모 기갑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서방 연합군의 선봉대인 미국 제3군이 독일 국경에 이르기 전에 포위, 격멸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1944년 9월 프랑스 아라쿠르(Arracourt)에서 독일 기갑 부대와 미국 기갑 부대 사이에서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졌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전투였는데, 독일 기갑 부대의 종말을 알리는 효시였다. 분명 스펙적으로는 판터가 셔먼을 상대로 확연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전차 성능의 차이가 전차전의 승패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전차병의 숙련도와 지휘관의 능력이 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쿠탕스 남동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롱시(Roncey)에서 독일 제7군과 서부기갑집단이 다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어 팔레즈 및 센 강 포위환에서 독일 B 집단군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8월 15일 지중해를 통해 제이콥 데버스 중장의 미국 제6 집단군이 상륙해 독일 제1군과 제19군을 남부 프랑스에서 몰아냈다.
미국 제6 집단군은 알자스 지방을 향해 진격했고, 버나드 먼트거머리 원수의 영국 제21 집단군은 벨기에 및 네덜란드 방면으로 진격해 지크프리트 선(서부 방벽)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빗장을 질러버릴 계획이었다. 만약 오마 브래들리 대장의 미국 제12 집단군과 데버스 중장의 제6 집단군이 알자스 지방 혹은 로렌 지방에서 조우한다면 독일은 본토를 제외한 유럽의 거의 모든 점령지를 잃게 될 터였다.
그리고 이 위협적인 공세에 선봉이 된 것이 조지 패튼 중장의 미국 제3군이었다. 미국 제3군은 파리를 지나쳐 메스(Metz)를 향해 문자 그대로 돌격을 하고 있었다. 독일 수뇌부는 패튼 중장의 빠른 진격에 크나큰 위협을 느꼈고, 패튼 중장의 주력 기갑 부대인 미국 제4, 제6 기갑 사단을 어떻게든 분쇄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서방 연합군에게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 수비부대가 항복하면서 셰르부르와 브레스트의 항구를 파괴한 건 둘째치고, 노르망디 전투 동안 벌어진 연합군의 폭격으로 프랑스의 철도 대부분이 파괴돼 보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이에 따라 9월 중순에는 원활한 진격이 불가능했고, 서방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장은 전군에 휴식과 재편성을 명령하려 했다.
더욱이 먼트거머리 원수의 영국군이 네덜란드 안트베르펀(Antwerpen) 항구를 포위하긴 했지만, 셸트(Scheldt) 강어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에 결국 항구 접수에 실패했다. 결국 이 실패의 대가를 캐다다군이 떠안아야 했고, 캐나다군은 가을 내내 셸트 강어귀의 통제권을 놓고 독일군과 이전투구를 벌였다.
이기고 있긴 했지만 서방 연합군의 상황은 의외로 좋지 않았고, 독일군이 궤멸 직전이라고 판단한 먼트거머리 원수는 아른험(Arnhem)을 통해 독일 북부로 진격한다는 초장거리 종심 돌파 작전인 마켓가든 작전을 입안했다. 아이젠하워 대장은 약간의 주의를 주고 이 야심찬 작전의 실행을 허가했다. 하지만 마켓가든 작전은 "다리가 너무 멀어서" 실패했고, 네덜란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대부분의 연료를 이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에 집중했기에 패튼의 제3군은 진격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서방 연합군 사령부 내부에서는 논쟁이 오갔다. 이젠 정말 연료가 없었다.
만토이펠과 독일 제5 기갑군
히틀러는 여전히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동부 전선에서 종종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의 판처트루펜(Panzertruppen, 기갑부대)이 승리를 안겨줄 거라 믿었다. 실제로 마켓가든 작전을 저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무장 친위대 기갑 사단들과 육군의 독립 기갑 부대들이었다.
설익고 말랑말랑하기 그지없는 미국의 기갑부대를 포위해서 격멸하겠다. 이것이 당시 히틀러의 의중이었다. 히틀러는 동부전선의 노장들과 숙련병들을 긁어모아 서부를 향한 대규모 기갑 공세를 준비했다.
1944년 9월 3일 히틀러는 서부 전구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에게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한 공세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독일 제3, 제15, SS 제17 기갑척탄병 사단 그리고 제111, 제112, 제113 독립 기갑 여단이 초기 공세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추가로 기갑교도사단, 제11, 제21 기갑 사단 그리고 제106, 제107, 제108 기갑 여단이 투입되기로 했다.
기갑전의 대가로 유명한 하소 폰 만토이펠 기갑대장이 동부전선에서 전속돼 와 독일 제5 기갑군 사령관이 되었다. 동부전선에서 제7 기갑 사단, 대독일 기갑척탄병 사단을 통해 용명을 떨친 만토이펠은 1944년 9월 1일 기갑대장으로 승진하고, 동년 9월 9일에는 군단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야전군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만토이펠 기갑대장의 독일 제5 기갑군은 패튼 중장의 미국 제3군을 분쇄할 준비를 진행했다.
마침내 독일 제5 기갑군의 기갑 역공세는 1944년 9월 12일로 날짜가 잡혔다.
이 기갑 역공세의 중핵은 신규 편성된 1944년형 독립 기갑 여단이었다. 이 부대들은 본래 1944년 여름에 '동부전선의 소방대' 역할을 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1944년형 기갑 여단은 제병합동부대라기보다는 전차와 기갑척탄병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기동타격부대였다. 독일이 기동방어나 공세 시 돌파부대로 임시 편성했던 연대 급 기갑 전투단을 상설화한 것이었다.
대부분 동부전선의 숙련병들을 기간으로 편성됐으며, 지휘관들 또한 수년 간 동부전선에서 경험을 쌓은 역전의 기갑 지휘관들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펠트헤른할레 기갑척탄병 사단의 잔존병력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독일 제106 기갑 여단이다. 여단장은 전설적인 '베케 중전차 연대'의 지휘관을 역임한 프란츠 베케 대령이었다.
단, 대다수의 인원은 신병으로 연료 부족까지 겹쳐 충분한 훈련을 하지 못했다. 이는 독일 제106 기갑 여단만이 가진 문제가 아니었다. 충분한 기갑 장비를 수령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기갑 여단이 연료와 지원 장비 부분에서 고충을 겪었다. 정비 부대도 없이 전선에 투입된 독일 제107 기갑 여단의 경우 마켓가든 작전을 저지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심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1944년 11월 해체되었다.
1944년형 제1파 기갑 여단 (제101~제110)
여단 지휘부(판터 x 3, 대공전차 x 4)
전차 대대 (판터 x 33, 4호 대전차 자주포 x 11)
기갑척탄병 대대
공병 중대
기갑수색 소대
보급수송대
1944년형 제2파 기갑 여단 (제111~제113)
여단 지휘부
기갑척탄병 연대
1전차 대대 (4호 전차 x 45, 대공전차 x 4)
2전차 대대 (판터 x 45, 대공전차 x 4)
돌격포 중대 (3호 돌격포 x 10)
공병 중대
기갑수색 증대
보급수송대
여단 지휘부(판터 x 3, 대공전차 x 4)
전차 대대 (판터 x 33, 4호 대전차 자주포 x 11)
기갑척탄병 대대
공병 중대
기갑수색 소대
보급수송대
1944년형 제2파 기갑 여단 (제111~제113)
여단 지휘부
기갑척탄병 연대
1전차 대대 (4호 전차 x 45, 대공전차 x 4)
2전차 대대 (판터 x 45, 대공전차 x 4)
돌격포 중대 (3호 돌격포 x 10)
공병 중대
기갑수색 증대
보급수송대
다수의 신병 유입과 연료난으로 인한 훈련 부족 문제 외에도 1944년형 독일 기갑 여단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역전의 지휘관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영미군과의 전투가 처음인 기갑 여단장들은 서부전선의 상황을 파악하고 휘하 부대를 통제하는 데 극도의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형 기갑 여단은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에 규모가 너무 작았고, 완벽한 제병합동부대도 아닌 탓에 포병의 지원을 받는 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더욱이 101-110번 독립 기갑 여단들은 수색 부대가 소대 급이었기에 전선 정찰에 매우 불리했다.
독일 기갑 및 기갑척탄병 사단장들은 기갑 여단장들의 지휘권을 무시했고, 이로 인해 독립 기갑 여단은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한 단순 대대 집합체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100대에 이르는 전차와 돌격포를 가진 강력한 독일의 기동타격부대는 실제로는 겉모습 뿐이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독일 제5 기갑군의 공격은 대규모 기갑 역공세가 아니라 '대규모 기갑 자살공격'이었다.
<참고문헌>
Steven Zaloga, Armored Thunderbolt (Stackpole Books 2008)
Steven Zaloga, Lorraine 1944: Patton vs Manteuffel (Osprey 2000)
Thomas L. Jentz, Panzertruppen vol.2 (Schiffer 2000)
Wilhelm Tieke, In The Firestorm of The Last Years of The War (J.J. Fedorowicz 1999)
Michael Reynolds, The Sons of The Reich (Casemate 2004)
Samuel Mitcham, Retreat to The Reich (Stackpole Books 2007)
George F. Nafziger, The German order of battle (Greenhill Books 1999)
덧글
끝으로 이 평가는 확실한데, 마켓가득 작전 당시 독일군이 더 많은 독립 기갑 여단을 네덜란드 방어에 투입할 수 없었던 건 상당 부분 패튼의 공입니다. 어그로를 있는 대로 끌어서 4개 독일 독립 기갑 여단을 자신에게 들러붙게 만들었으니까요. 패튼의 나름 성공적이었던 모젤 강 도하와 로렌 지구 공세가 없었다면,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 많은 독일 기갑 여단들이 대체 같은 시기에 어디로 갔을까요?
전지전능한 미 육군 야전포병과 육군항공대, 그리고 끝없이 몰려나오는 셔먼에 압살당할 독일군의 입장에 감정이입을 해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지금 상황에서 놓고보니 말씀하신대로 발지 전투를 앞두고 모델원수가 한말이랑 똑같네요 "다같이 죽으러가자"
구데리안이 영관 시절부터 입에 달고 다닌 말이죠.
전차와 기계화 보병을 대대 규모로 쪼개서 이런 땜질 부대를 만든 거 자체가 에러로 보입니다.